울산대학교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김양호 교수는 지난 8월 정년을 맞았다. 1999년 진료를 시작했으니 스무 해 넘는 세월 한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 그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뚝심의 위로를 얻을 것이다. 그간 이뤄낸 연구 업적에 대해 물었다.

글 편집부 / 사진 송인호(스튜디오100)

‘산업의학’이라는 꿈을 이뤄낸 여정

울산대학교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김양호 교수는 직업병과 관련해 많은 연구업적을 남기고 지난 8월 정년퇴임했다. 1999년 9월부터 울산대학교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했으니, 자그마치 스무 해를 넘긴 오랜 세월이다. 그는 산업중독학을 전문으로 수많은 근로자를 만나왔다. 지금은 후배 교수에게 바통을 넘겼지만, 직업환경보건센터장 및 직업환경의학과장도 6년 넘게 맡아온 직책이다.

처음 의과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산업의학을 전공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당시 그는 의사가 되면 막연히 사회봉사를 하겠다는 생각만 가졌었다. 그러다 졸업할 즈음 산업의학을 공부해 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을 구체적으로 품게 됐다. 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는 녹록지 않았다.

“당시 군사 정권 아래서 경제발전을 가장 우선하던 때라, 직업병이나 노동자의 건강 등을 언급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산업의학을 공부할 만한 대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산업의학과 비슷한 가정의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렇다고 한 번 먹은 마음을 포기할 그가 아니다. 이후 김양호 교수는 서울대보건대학원에서 산업위생을 전공했다. 또 독학으로라도 산업의학을 체험하겠다는 생각으로 NGO(비정부기구)에서 만든 의원에서 직업병 상담을 했다. 그때 원진레이온의 이황화탄소 중독 사건을 경험하면서 직업병 진단과 상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그는 산업의학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게 됐다.

“NGO에서 직업병 상담을 하면서 무척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 보람은 산업의학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일본에 유학해 5년간 박사과정을 거쳤습니다. 유학 후에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4년 6개월간 수석연구원으로 지내면서 현장의 역학 조사를 경험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 울산대학교병원으로 왔습니다.”

세계에서 주목 받은 망간 연구

우리나라의 재해율과 산재사망률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형편이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2020년 산업재해자가 10만8천여명 발생했고, 이 가운데 882명이 일터 사고로 생명을 잃었다.

산재사고사망만인율(노동자 1만 명당 산재사고로 사망하는 인원)은 산업안전 주요 선진국보다 3~4배 정도 높은 수준이다. 2020년 업무상 질병자 수는 15,996명이며, 업무 관련성 근골격계 질환이 약 60%정도를 차지한다. 몇 년 전부터는 직업성 암, 생식 독성, 직무스트레스로 인한 정신건강 문제도 화두가 되고 있다. 근로 형태와 근로 환경이 다양해지면서 발생하는 일터의 다양한 위험 요인도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김양호 교수는 울산대학교병원에 온 1999년부터 꾸준히 직업병 관련 연구를 해왔다. 이론과 실전경험을 쌓은 상태로 울산대학교병원에 왔기에 그의 연구는 이곳에서 날개를 활짝 폈다. 그는 여러 가지 연구 중에서 핵심 연구로 ‘망간 연구’를 꼽는다.

“망간 연구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근무할 때 용접공의 망간 중독으로 처음 시작했지만, 울산대학교병원에 오면서 한층 더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용접공의 신경영상 연구를 하면서 망간에 노출될 때 뇌 MRI에서 나타나는 고신호 강도의 중독학적 의미를 깊이 있게 연구하였습니다. 기존 영상 연구에 기능적 영상연구(functional MRI, MRS, DTI 등)를 추가하면서 망간 중독의 신경영상의학적 의미를 밝혔습니다.”

이는 해외학회에서 외국 연구자들이 많은 관심을 표현해 주목을 받았을 정도로 세계에서 선도적인 연구였다. 이후 용접공뿐만 아니라 만성 간질환자와 일반 인구 등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냈다. 김양호 교수는 망간독성에 대한 역학적 조사, 실험연구도 진행해 망간 중독학의 거의 모든 측면을 망라한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는 울산대학교병원이 갖춘 풍성한 조건 덕분이라며 겸손함을 보인다.

“망간을 연구하는 세계 연구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던 것은 제 연구 일생에 무척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결과는 울산대학교병원 각 과에 훌륭한 교수님들이 계시고, 상호 협진이 잘 되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변화를 지향하는 연구의 보람

최근 김양호 교수는 실천적 성격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연구를 통해 그는 울산 지역에 산업안전보건법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가 많고, 그들이 건강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산업의학계에서 가려져 있던 실상을 연구로써 확인함으로써 실천적 연구가 현실 변화로 연결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로서는 보람 있고 사회에서는 크게 의미 있는 일이다.

“영세사업장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나 홀로 영세자영업자, 구직을 하는 일시적 실업자 등 산업안전보건제도의 사각지대에 있는 취약노동자의 건강과 노동력을 증진시키려면 지자체가 취약노동자의 건강과 노동력 증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도 제시했습니다. 이런 노력 끝에 울산광역시 및 울산광역시의회가 협력하여 울산광역시 취약노동자 건강증진조례를 제정하게 됐고, 이에 근거하여 ‘울산광역시 취약노동자 건강증진센터’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다. 김양호 교수는 여러 가지 직업병 역학 조사도 해왔다. 특히 기억에 남는 역학 조사로 울산대학교병원에 오기 직전인 1995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수행한 조사를 꼽는다. 양산의 전자제품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들과 남성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생식장해를 나타낸 사건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무월경과 불임을 호소했고, 남성 노동자들은 정자감소증(무정자증)을 보였다.

“역학조사 결과 2-bromopropane이라는 새로운 물질이 생식장해를 일으킨다는 것을 처음 발견하였습니다. 그동안 이 물질의 유해성에는 아무런 보고도 없었습니다. 역학조사 결과 그 물질의 유해성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밝히고, 그 물질을 사용할 때 주의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이슈가 된 가습기 살균제와 같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유해성을 보고한 것으로 의미 있는 역학조사였습니다.”

울산대학교병원에서 진료하고 연구한 시간은 김양호 교수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일까. 그는 행복한 삶이었다고 답한다.

“서울에서 울산으로 와 22년 동안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울산대학교병원은 각 과가 임상적으로 탄탄한 교수진으로 채워져 있고, 협조적이고 공동 연구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습니다. 이런 조건이 지금까지 제 연구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협진 및 공동연구 분위기는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 김양호 교수의 바람이다. 또 그는 실천적 연구를 통해 사회가 조금이라도 변화하고, 자신의 연구가 그곳에 작게나마 기여하는 희망과 바람을 갖는다.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바뀌는데도 굳건히 존재하는 이들의 뚝심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를 건넨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 묵묵히 맡은 바 역할을 해낸다면, 언젠가는 당신에게도 ‘해 뜰 날’이 올 거라는 태산 같은 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