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다. 삶의 유한성을 깨닫는다면, 남은 삶이 좀 더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을까. ‘삶을 마무리하는 순간’과 자주 마주하는 울산대학교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이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 센터장인 고수진 교수가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

글 편집부 / 사진 송인호(스튜디오100)

다양한 돌봄을 제공하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울산대학교병원 혈액종양내과 고수진 교수는 유방암과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전문으로 진료하고 있다. 2013년 울산대학교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했고, 2019년부터는 호스피스완화의료 센터장을 맡고 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처음 알게 된 건 서울아산병원에서 내과전공의 수련 시절, 교회 자원봉사로 가정 호스피스를 경험하면서다. 당시에는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전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전공의 2년 차를 마칠 무렵 생긴 음식 알레르기(food allergy)는 예상치 못하게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전공의 2년 차 막바지에 음식 알레르기가 생겼고, 그로 인해 아나필락시스 쇼크(anaphylactic shock)를 몇 차례 경험했어요. 정확한 원인 음식을 모르는 상태에서 몇 번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경험을 하면서 ‘언제라도 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후 진로를 고민하던 내과 4년 차,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돕는 것을 소명으로 품고 본격적으로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동을 시작한 이경식 교수가 진료하는 서울성모병원 종양내과에서 전임의 수련을 받고, 가톨릭의대에서 내과학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고수진 센터장이 수장으로 있는 울산대학교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는 2012년 울산광역시에서 처음으로 보건복지부의 인정을 받은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기관이다.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회복 가능성이 없고 점차 증상이 악화해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태를 ‘말기'라고 한다. 말기가 되면 항암 치료와 같은 생명 연장 치료는 받지 않더라도 통증 등 힘든 증상은 조절하면서 지낼 수 있다.

또 앞으로 남은 소중한 시간을 환자가 원하는 장소에서 가족과 함께 하고 싶은 일, 꼭 해야 하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말기 환자와 그 가족에게 통증과 증상 완화 등을 포함한 신체적, 심리사회적, 영적 영역의 종합 평가와 치료를 제공하는 의료서비스가 ‘호스피스 완화의료’다.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에서는 통증, 구토, 호흡곤란, 우울, 불안 같은 증상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의료서비스와 함께 전문 심리사회적 지지와 임종 돌봄, 사별 가족 돌봄을 제공한다.

“암, 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 폐쇄성 호흡기질환, 만성 간경화, 그밖에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질환 말기에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살아있는 마지막까지 편안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통증과 증상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적극적으로 다양한 돌봄을 제공합니다.”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을 때

고수진 센터장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닿아야 하는 마지막 관문 앞에서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통해 말기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인생’을 배우고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깨닫는다.

“영화를 보면 막바지로 갈수록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후 결말을 짓듯,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그동안 살아왔던 과정의 중요한 문제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말기에는 지위, 부, 교육 수준 등과 전혀 상관없이 그동안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얼마나 잘 맺어왔는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소중한 사람들과 보내는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닐까요. 말기로 병상에 누워 있는 순간도 여전히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로서, 화해하고 용서하며 감사와 존경과 소망을 나누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고수진 센터장은 말기 암환자들이 경험하는 신체적, 심리정서적, 사회적, 영적 요구가 무엇인지 연구 조사해 2014년 기독교상담학회지에 <말기 암 환자들의 필요에 대한 질적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말기 암환자들의 우선된 바람은 신체적 고통을 줄이는 것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주길 원하면서 자신의 질병 치료에 대한 결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를 원했다. 또한 자신의 제한된 생애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말기 암환자들은 미안함, 후회, 외로움, 슬픔, 서러움, 아쉬움 등 다양한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하는데 이 모든 감정은 가족 관계의 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가족 관계가 친밀하다고 느끼는 이는 가족에게 미안함과 아쉬움의 감정을 느끼면서 자신의 고통과 죽음이 가족에게 유익을 끼치는 의미를 찾아내기도 했다. 반면 가족간 정서적 교류가 부족하고 지지 관계가 약한 이들은 관계 단절에서 비롯한 외로움, 서러움, 슬픔, 버림받음 같은 부정적 감정을 경험했으며, 자신의 삶이 가치를 잃어버렸다고 느끼기도 했다.

우리 사회가 고령화에 접어들며 ‘죽음’이 ‘삶의 아름다운 맺음’이라는 의미로 새롭게 다가오는 분위기다. ‘호스피스 완화의료와 연명의료법’만 봐도 죽음을 바라보는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한 공포는 쉬이 가시지 않는다. 고수진 센터장 역시 인간의 가장 큰 고통과 두려움은 죽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삶의 유한성을 깨닫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죽음 이후에는 ‘나’의 존재가 완전히 없어져요. 인간은 모두 마지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죽음을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하지요. 말기로 진단된 환자나 가족을 만나면 ‘말기’라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거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인생의 중요한 것을 볼 수 있고, 삶을 바르게 살아가는 지혜와 용기를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까지 사랑하고 사랑받길

고수진 센터장은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를 거쳐 간 많은 환자와 가족이 있지만 센터에서 오랜 기간 함께 지내다가 임종한 아이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중에서 채원은 뇌간교종으로 울산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과에서 항암 치료를 받던 중 상태가 악화해 센터로 의뢰해온 사례다.

“처음 채원이 아버님을 만났을 때 중환자실 대신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를 선택하는 것이 아이를 포기하는 것 같다고 돌봄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습니다. 아버님에게 중환자실에서는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없고, 연명치료가 오히려 고통을 증가시킬 수 있다고 설명하자 채원이를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동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동으로 옮기면서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하여 두통을 조절하고 채원이와 부모님은 입원 이후 처음으로 편안한 잠을 잤다며 호스피스에 마음을 열었습니다. 이후 증상이 잘 조절되어 퇴원해 집에서 가정형 호스피스를 받으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상태가 다시 악화해 호스피스 병동으로 재입원했을 때 부모님이 많이 힘들어하셨지만 호스피스 완화의료 팀원들의 돌봄으로 채원이의 증상이 다시 조절되었습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의과대학 자원봉사 학생들이 이벤트로 불러준 폴킴의 ‘모든 날 모든 순간’이라는 노래로 위로 받으며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던 채원은 하늘나라로 떠났다. 채원이 아버지는 “지금까지 힘든 시간을 잘 견뎌준 아들에게 고맙고, 채원이가 호스피스팀의 돌봄으로 남은 시간 동안 행복하고 따뜻하게 보냈다”라고 전했다. 덧붙여 “아들은 하늘나라로 떠났지만 치료 과정에서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소아 환자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느꼈다. 힘들게 투병하는 환자와 보호자가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도움을 받길 바란다”라고 전하며 마음을 담은 기부금을 전달했다.

“부모님은 호스피스 팀원들이 채원이를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투병 중에 찍은 사진을 모아 달력을 만들어 주셨어요. 센터에서는 채원이의 피규어를 만들어 부모님께 전달했습니다. 채원이 아버님께서는 ‘채원이 생전의 온기가 기부를 통해 오래 남기를 바란다’는 마음으로 현재까지 울산대학교병원 호스피스후원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호스피스 발전에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고수진 센터장은 앞으로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확산되어 보다 많은 이들이 전인적인 돌봄을 받기를 희망한다. 더불어 울산 지역에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확산돼 생명사랑 문화가 꽃피는 아름다운 지역이 되기를 소망한다.

“호스피스 자원봉사 활동은 목욕, 샴푸, 면도를 돕고, 휠체어를 밀고 산책을 하거나 노래를 불러드리거나 연주를 해드리는 등 다양합니다. 즉 봉사자들의 장기를 살려 말기 환자들과 삶의 소중한 순간을 함께하며, 섬김과 나눔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이들이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한다면 말기 환자에게도 도움이 되지만 돌보는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에도 모든 사람은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고수진 센터장은 “잘 태어나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을 의미 있게 마무리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우리들 생애의 저녁에 이르면, 우리는 얼마나 타인을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 받을 것이다”고. 인간은 사랑 안에서 산다. 마지막까지 예외는 아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고수진 센터장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하다.

울산대학교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

울산대학교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는 2012년 울산광역시 내에서 처음으로 보건복지부로부터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기관으로 인정받고 입원형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시작했다. 현재 호스피스 완화의료 서비스는 입원형, 가정형, 자문형 형태로 제공되고 있다. 입원형 호스피스는 10병상을 운영하며 의사 6명, 간호사 7명, 사회복지사 1명이 팀을 이룬다. 2016년부터 시작된 가정형 호스피스는 울산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말기 환자의 집을 방문해 전인적인 호스피스 돌봄을 제공하는 서비스로 의사 3명(자문형과 겸직), 간호사 3명, 사회복지사 1명(자문형과 겸직)이 팀을 이룬다. 가정형 호스피스 서비스는 진통제와 영양제를 비롯한 의료 처치뿐만 아니라 심리적, 사회적 돌봄을 통해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동에서와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2018년부터 시작된 자문형 호스피스는 일반 병동이나 외래에서 협진 형태로 돌봄을 제공하는 서비스로, 의사 3명, 간호사 1명, 사회복지사 1명이 팀을 이루어 활동한다. 울산 지역에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시범사업을 하고 있는 요양병원이 2곳이지만 보건복지부의 지정을 받은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기관은 울산대학교병원이 유일하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기관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 팀원들이 말기 환자와 가족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한 결과, 울산 지역 암 사망자 중 호스피스 완화의료 이용 비율은 33.5%에 달해 전국 이용 비율 24.3%에 비해 크게 높은 수준이다. 또한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기관 평가에서 최고 등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유럽종양학회(European Society of Medical Oncology, ESMO)에서 ‘ESMO Designated Centre of Integrated Oncology and Palliative Care’로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