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 했다. 수능시험을 앞두고 갑자기 찾아온 ‘병’ 앞에서 한 번의 깊은 절망과 여러 번의 커다란 기적을 경험한 이인경 학생과 그에게 조혈모세포 이식을 시행한 혈액종양내과 최윤숙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희망은 우리를 에워싸는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길을 낸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글 편집부 / 사진 백기광(스튜디오100)

울산대학교병원의 이식클리닉, 암 생존자관리 시스템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관심을 보일 정도로 우수한 진료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골수이식 건수는 해마다 증가 추세이며, 2021년에는 의료 인력을 보강해 더 많은 골수이식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 울산대학교병원 조혈세포이식센터는 보다 많은 환자들이 완치하여 소중한 가족의 품으로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더 단단한 꽃길이 펼쳐질 삶

최윤숙 교수는 “골수이식의 치료 성적은 의사가 환자에게 쏟는 시간과 정성에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환자의 사소한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한 단계 더 발전된 치료를 위해 늘 연구한다.

수능시험을 한 달 앞둔 평범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갑자기 피부에 멍과 입안 출혈 증상을 보이며 병원 응급실에 방문했어요. 인경 학생이었습니다. 질환명은 ‘중증 재생불량성 빈혈’이었어요. 재생불량성 빈혈은 골수의 혈액 생성 기능이 심각하게 저하해 심한 빈혈과 백혈구, 혈소판 수치가 떨어지는 병으로 암은 아니지만 희귀 혈액질환입니다. 그대로 두면 감염과 출혈 위험이 무척 높아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고, 골수 기능 저하 정도가 심해 유일한 완치 방법은 동종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는 것이죠. 인경 학생은 빠른 이식 진행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조혈모세포 이식, 즉 골수 이식은 환자의 병든 골수를 없애고, 건강한 정상인의 조혈모세포를 기증받아 이식하는 거예요. 이를 위해 환자는 무균실에 입원해 강력한 항암치료를 약 6일간 투여받고, 이후 공여자에게서 채취한 조혈모세포(골수 또는 말초세포)를 환자에게 주입하게 됩니다. 또 항암제와 더불어 환자는 공여자의 세포를 한몸처럼 받아들이기 위해 면역억제제를 투여받아야 하는데, 면역기능이 최저상태로 떨어지기 때문에 감염 위험이 매우 높아집니다. 따라서 환자는 골수이식 기간 동안 3주가량 철저하게 외부 유해 감염 요인으로부터 보호하는 무균실 격리 생활을 합니다.

인경 학생은 골수이식을 위해 무균실에 입원해 수능시험을 봤습니다. 이런 사례는 국내에서 처음이 아닐까 싶네요. 인경 학생은 그 과정에서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어요. 수능 날을 피해 항암 주입 스케줄을 미리 마칠 수 있도록 이식 날짜를 정하고, 수능 날에는 시험에 방해가 되지 않게 검사와 투약, 식사 스케줄을 조절하는 등 이식코디네이터와 무균실 간호사들이 애써주셨습니다.

또 방호복을 입고 무균실 안에서 시험 감독을 해주신 선생님, 중학생이지만 용기 있게 골수를 기증해준 환자의 동생, 어른보다 담담하고 의젓하게 치료를 잘 견뎌준 인경 학생의 의지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골수이식하고 12일째 되는 날은 인경 학생의 대학교 입학 면접시험이 예정된 날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인 무균실 생활 중 면접을 보러 갈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여서 거의 포기 상황이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나요. 평균적인 환자보다 2일가량 빨리 골수가 생착되기 시작하여 백혈구 면역 수치가 회복되고, 고열과 같은 합병증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경 학생은 극적으로 무균실에서 나와 곧장 서울로 대학교 입학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이후 치료를 잘 마무리해 골수검사에서 정상 골수 상태로 기능이 회복됐고, 대학에도 당당히 합격해 저를 포함한 의료진들 역시 기쁨과 보람을 두 배로 느꼈습니다.

같은 질환을 가진 환자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조혈모세포 이식은 쉽지 않은 과정이고 위험한 합병증도 발생할 수 있지만 희귀 혈액 질환이나 혈액암 완치에 가장 확실하고 좋은 치료 방법이에요. 어차피 겪어야 하는 치료과정이라면 불안함과 걱정보다는 인경 학생처럼 “잘 될 거야”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치료 과정을 잘 따라오시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조혈모세포 이식이라는 힘든 치료를 이겨낸 만큼 앞으로 인경 학생의 삶은 더욱 단단한 꽃길이 펼쳐질 거라고 기대합니다.

절망 뒤엔 행복이 찾아온다는 것

이인경 학생은 투병 중인 어린 친구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모든 이에게 절망의 순간이 찾아오지만 단지 그 순간이 이른 것뿐이라고. 우리는 이 순간을 발판 삼아 더 성장할 수 있고 덕분에 보통의 일상을 더 감사하게 된다고. 앞으로 펼쳐질 행복을 위해 이 순간을 씩씩하게 이겨내자고.

여느 고3 수험생처럼 수시 원서 접수를 마치고 잠시 숨을 고르던 어느 날이었어요. 갑자기 몸에 작은 반점들이 생기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점점 반점들의 범위가 넓어져 동네 피부과를 찾았어요.

의사 선생님께서는 자반증이라고 하셨는데, 하부에만 생기는 보통의 자반증 환자에 비해 전신에 생긴 증상을 보고 피검사를 권유하셨어요. 입에서도 피가 나기 시작했고 심상치 않다고 느껴 소견서를 받아 울산대학교병원을 찾았습니다.

응급실에 입원해 많은 검사를 받았어요. 정상인은 15만 개인 혈소판이 저는 1000개뿐이라고 하더라고요. 바로 입원했어요. 혈소판뿐만 아니라 호중구, 백혈구 등 다른 수치도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제 병명은 골수가 일을 하지 않아 혈액세포들이 감소하는 ‘중증 재생불량성 빈혈’이었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막막했어요. 건강했던 제게 소리 소문 없이 찾아온 병이 무서웠어요. 수능과 면접을 앞두고 깜깜한 미로 속에 갇힌 듯한 시간이 시작됐습니다.

왜 하필 이 시기에, 내게 병이 찾아왔는지 원망하면서 큰 절망과 우울감에 빠졌어요. 코로나19 탓에 면회도 제한됐어요. 가족, 친구도 못 본 채 홀로 병원에 있으면서 답답하고 화가 났죠. 그런데 문득 ‘이렇게 감정 소비를 해서 달라질 게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내린 결론은 ‘이 순간을 받아들이자’였어요. 상황에 깊게 빠지지 않으려 애쓰다 보니 담담해졌고 무엇보다 고생하시는 부모님, 걱정해주시는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며 더 씩씩해지기로 마음먹었어요. 제가 약해지면 사랑하는 이들이 저로 인해 더 힘들어지는 게 싫었어요. 마음가짐을 바꾸니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죠. 병원에서 예정된 수능을 위해 수능 공부를 하고, 그전까지 보지 못한 영화나 드라마도 실컷 봤어요. 또 혹시 볼 수 있을 면접을 연습하다 보니 그간 느꼈던 부정적인 생각이 싹 사라졌어요.

묵묵히 병원 생활을 하다 보니 기적 같은 순간들이 찾아왔어요. 첫 번째 기적은 조혈모세포 이식을 하려면 기증자와 각 항목들이 일치해야 했는데, 친형제와 일치할 확률은 25%로 적어요. 제게 한 명뿐인 남동생과 검사 결과 100% 일치하는 기적이 이루어졌지 뭐예요.

두 번째 기적은 치료 과정에서 대학교 1차 결과 발표가 나기 시작했어요. 3개 학교의 1차에 합격했지만 2개 학교의 면접은 치료 기간이라 참석할 수 없었고 1개는 애매한 날짜여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식 후 보통 사람보다 빠르게 생착해서 혈액 수치가 올라갔고 외출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돼 기적처럼 면접에 참석했는데, 그 대학에 합격했어요. 지금은 신입생이 되어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답니다.

치료 과정에서 고마운 분들이 정말 많아요. 울산대학교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님들은 우리나라에서 최고 유능하시다고 생각해요. 덕분에 빨리 나을 수 있었어요. 간호사 선생님과 조무사님들에게도 감사함을 전하고 싶어요. 따뜻한 위로와 응원은 외로운 입원 기간 동안 정말 큰 힘이 되었어요.

병은 절망이었지만 많은 기적이 제게 찾아왔어요. 투병 기간 동안 ‘행복 총량의 법칙’을 믿게 되었어요. 눈앞에 닥친 불행이 있다면 그 뒤엔 행복도 찾아온다는 것. 지금 투병 중인 모든 분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현재 불행 속에 잡아먹히지 말고 잘 싸워 이겨내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