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의 즐거움

글 박찬애 / 사진 백기광(스튜디오100)

몇 해 전 봄날, 다섯 살 난 조카와 산책 중이었다. “자, 선물!” 샛노란 민들레를 내민다. 이렇게 예쁜 짓을 하다니. 콧날이 시큰거리려는데, “이모, 이모는 이다음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묻는다. 난도 높은 질문이다. 잠시 고민해보려는데, 저만치 놀이터를 발견하곤 냅다 뛰어간다.

화창한 날씨에 봄꽃이 만발한 무렵, 나는 세상의 우울과 노화, 갱년기 증상을 온몸으로 겪고 있었다. ‘노안’이라는 말에 눈물이 핑 돌고, 흰 머리가 늘고, 폐경 등 막다른 골목에 몰린 느낌이었다. 칙칙한 낯빛에 주름은 깊어지고, 허리는 굵어져 갔다. 건망증 때문에 메모를 해놓곤 그 메모지를 어디에 뒀는지 찾느라 한나절,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려면 시험장에 도착한 듯 서늘했다. 뒤에서 누가 미는 것도 아닌데 걸핏하면 넘어지고 부딪힌다. 적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다 보면 말문이 막힌다. 하나를 겨우 외우면 둘을 잊었다. 그랬다.

조카가 던진 뜻밖의 질문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다음에 커서’ 오늘을 돌아봤을 때 똑같은 모양새로 우울하고 있으면 안 되겠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평소 영화광이었던 나는, 이즈음부터 다큐멘터리를 열심히 찾아봤다. 타샤 튜더, 아녜스 바르다, 스티브 잡스, 루치아노 파바로티, 존 레논, 파블로 피카소, 엔니오 모리코네…. 이들을 더는 볼 수 없어 진심으로 아깝고 안타까웠다. 그리고 문득 아프고, 늙고, 죽고, 모두 공평하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받아들이고, 이왕이면 나이 듦이 좋은 이유를 찾아볼까? 맙소사! 찾으니, 많다.

‘지금, 여기’의 삶을 산다 시간의 유한성을 알게 되니, 어찌할 수 없는 과거가 내 발목을 여전히 잡도록 놔두지 않는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일로 걱정을 사가며 끙끙 앓지 않는다. 순간순간이 모여 내 인생이 된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

‘관계’의 소중함을 안다 나 혼자 잘 먹는 게 아니라, 주위와 나누고 베풀고 살피며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것, 관계의 행불행이 내 삶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

겸손해진다 무릎이 툭 꺾여 주저앉아 보았다. 뜻이 있는 곳에 꼭 길이 놓여 있는 것도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당신의 등이 잘 보인다.

분별력이 생긴다 실패나 실수까지도 경험이고 자산이 됐다. 그 모든 게 데이터로 저장돼 위급한 순간에 시행착오를 줄여준다. 마치 스위치가 반짝 환하게 켜지듯.

공감을 잘한다 산전수전공중전을 치러보니, 누군가의 사연에 날카로운 칼날을 삼가고, ‘그러려니’, ‘ 저도 그래요’ 너그러이 편들기도 한다. ‘저런!’, ‘잘될 거예요’ 추임새도 넣는다.

당황하지 않는다 사람이 또는 상황이 툭툭 칠 때, 내 인생을 마구 흔들 만큼의 의미가 없다면, 그냥 보낸다. 재미도, 의미도, 쓸모도 프레임을 바꿔본다.

내 호흡대로, 내 보폭대로 걷는다 경쟁하느라 쫓기듯 뛰고, 숨차고 멀미를 했지만, 이제는 머물고 싶은 곳에서, 쉬고 싶은 만큼 쉰다.

공부하는 재미 행복과 성공에 대한 재정의를 위해서, ‘괴물’이 아닌 ‘괴짜’가 되어 보려고, 흥미로운 모든 것을 읽고 밑줄 치는 중.

눈치 보지 않는다 “오늘 회식이니 맘껏들 시키라고, 난 짜장면!” 하는 부장님 따라 “그러면 저도 짜장면”이라 하지 않는다. “여기 짬짜면, 탕수육, 군만두 추가요” 외치고, 남으면 포장해 달란다.

좋아하는 것을 확실히 안다 어떤 사람에게 마음이 가는지, 어떤 풍경 앞에서 발길이 멈추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오래도록 곁에 두고 가까이 보고 싶은 것들을, 확실히 안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다. 이보다는 ‘항상 모든 순간을 즐겨왔다’는 타샤 튜더의 말에 마음을 빼앗긴다. 기쁨, 슬픔, 좌절, 실패, 수치심, 사랑, 눈물, 이 모든 것이 나를 드나들며 내 역사를 만들었다. 오늘도 나는 나이를 먹는다. 그게 뭐 어때서? 우물쭈물하지 말고, 매 순간을 즐기며, 반겨야지. 어서 오렴, 나의 역사여, 나이 듦이여!

글을 쓴 박찬애 시인은 『꼬치꼬치 선생님과 함께 쓰면 일기가 술술 써지네』라는 책을 냈다. 인터넷과 tv방송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거나, 칼럼을 쓴 바 있다. 나이 들어 그림과 사진에 취미가 생겼으며, “감각이 살아있다. 전에 어디서 배운 적 있느냐”는 칭찬을 듣는 우등생이다. 훗날 개성 넘치는 전시회를 여는 게 꿈이다. ingcool@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