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청춘(靑春) 언저리에 머무르는데, 흐르는 세월을 잡을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이치다.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노화. 정신건강의학과 안준호 교수는 “나이 들면서 오랫동안 축적된 경험은 삶을 통합적으로 바라보고 현명한 판단을 하도록 돕는다”고 설명한다. 우리에게는 이런 나이 듦을 똑바로 마주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안준호 교수가 건네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글 편집부 / 사진 백기광(스튜디오100)

후회 없는 정신과 의사의 삶

정신건강의학과 안준호 교수는 서울아산병원에서 수련을 마치고 1997년, 울산대학교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당시 함께 근무했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은 다양한 이유로 병원을 떠났지만 그는 울산대학교병원에 뿌리내리고 24년간 진료를 이어오고 있다. 주로 우울증 등 기분 장애, 조현병, 불안 장애, 불면증 등 성인의 다양한 정신 질환을 다룬다.

어릴 때부터 의사라는 꿈을 가졌던 건 아니다. 세상일은 계획대로 되기 어렵고 시행착오와 운이 많이 따르는데, 그는 지금의 역할이 주어진 데는 행운이 적잖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고등학생이 ‘의사’라는 직업을 얼마나 알겠습니까. 저는 1982년 학력고사 성적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진로를 선택했습니다. 고2 시절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과외가 전면 금지되고 본고사가 폐지된 덕을 보았죠. 저는 과외를 받은 적이 없는데, 당시 본고사를 봐야 했다면 불리했겠죠.”

시작은 이성적이요, 현실적이었지만 안준호 교수는 다행히 의대 과정에 무던히 적응했다. 인간 정신과 행동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정신과를 전공했고, 현재의 타이틀은 열아홉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정도로 그는 만족한다. “호기심을 채우고 삶을 알아가는 과정이 즐겁습니다. 다음 생에서도 의사가 되고 싶어요. 세상이 변해도 꼭 필요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새로운 입시 제도에서 의대 입학이 가능할지 모르겠군요(웃음).”

나이 듦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으며 피해갈 수 없는 ‘노화’에 대해 묻자 그는 “당황스럽다”고 답했다. ‘철학적인 물음’에 거창한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은 아니다. 마치 그에게 ‘노화 경험’을 묻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그가 경험하고 만난 많은 사람들이다. 노화를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던 사람들인데, 그들의 태도는 두 갈래로 나뉜다. 나이 듦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람과, 나이 듦을 떠올리려 애쓰는 사람. 전자는 나이는 갑자기 들지 않으므로 나이 듦을 의식하기도 어렵지만 대개 나이 듦을 외면하고 지낸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불현듯 자신의 나이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관련 일화를 들려준다. “몇 년 전 일입니다. 서울에서 늦은 회의를 마치고 지친 몸으로 울산에 오려는데, KTX가 만석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입석 승차권을 사서 통로에 기대어 섰습니다. 대전을 지나자 젊은 승무원이 제게 다가와 작은 소리로 빈 좌석 번호를 일러주어 자리에 앉았죠. 저는 승무원의 친절에 감사하며 흐뭇해하다가 ‘아차’ 했습니다. 그 많은 입석 승객 중 ‘왜 나에게 자리를 권했을까?’ 올려다보니 통로에는 젊은 청년들이 꿋꿋하게 서 있더군요. 지금도 노인을 보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청년 시절 습관이 나오는 저로서는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이었습니다.”

후자는 나이 듦을 떠올리려 애쓰는 부류다. 그의 진료실을 찾는 이들 중 50대를 지나면서 자신의 기억력 저하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나이에 따르는 간헐적 건망증을 지레 걱정하는 것이다. “평소 친구나 유명한 연예인의 이름이 갑자기 기억나지 않으면 당황합니다. 어떻게든 떠올리려 애써보지만 그럴수록 긴장해서 기억이 꽉 막히곤 합니다. 그러면서 치매가 아닐까 염려해 내원한 분 중 다수는 기억이 정상 범위입니다. 물론 나이 들면서 기억이 조금씩 저하되고 반사도 다소 느려지는 것은 아쉽습니다. 하지만 너무 비관적으로 볼 건 아니지요.”

안준호 교수는 누구나 노화를 잊고 싶어 하지만 나이 듦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그래야 나이 듦에 맞춰 자신의 삶을 조금씩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잘하는 일과 어려워진 일을 구분하고, 앞으로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찾아 나가는 것이 나이 듦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라는 것이다. “어릴 적 꿈꾸었던 원대한 목표나 초지일관하는 태도는 삶의 초기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나와 세상을 알아가면서 삶의 계획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방향은 대개 현실의 욕심을 줄이고, 달라진 능력과 흥미에 맞춰 업무와 개인적 활동을 재배치하는 것입니다. 평소 나이 듦을 인식하고 이를 기꺼이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노후에 건강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는 부모의 노화도 잊고 지내기 쉬운 부분이라고 귀띔한다. “자녀는 부모를 어릴 적 자신을 지켜주던 든든한 모습으로 내내 기억하기 쉽습니다. 늘 괜찮다고만 하시니 나이 듦을 눈치 채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부모가 일 처리가 느려지고, 비밀번호를 자주 깜빡하면 자녀는 답답해서 짜증을 내다가 문득 세월을 절감하게 되지요.”

진정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100세 시대, 우리나라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지 이미 오래전이다. 과연 언제까지 청춘이고, 언제부터 노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안준호 교수는 “일반적으로 65세부터 노년기라고 정의하지만 실제로는 청춘과 노년을 나이만으로 경계 짓기는 어렵다”고 답한다. 누구나 ‘나이 듦’을 겪지만 ‘노화’가 나타나는 시기는 개인 차이가 크다는 것. 이것이 노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청년 시절에는 신체 기능과 지적 능력이 크게 차이나지 않지만 70대가 되면 사람마다 격차가 크게 벌어진다. 60대에 이미 활동과 흥미가 급격히 감소하는 사람도 있고, 80대에도 건강하고 지적 활동이 왕성한 사람도 많다. 백세가 넘어서도 사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끈을 놓지 않고 왕성한 필력을 과시하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도 있지 않던가.

노년기에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는 안준호 교수 역시 궁금하지만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유전적 면도 있고 후천적 영향도 있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그는 그중 생활 습관과 삶의 태도 등 후천적 요인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노년기에 생기는 질환에 대처하는 현대인의 방식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정기 건강검진을 통해서 노년기에 생기는 질환을 조기에 진단하고 대처할 수 있다.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비만 등을 조기에 발견하면 약물을 복용하거나 생활습관을 바꾸려 노력한다. 이런 검사와 치료는 꼭 필요하지만 여기에는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런 질환은 진단 시점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 무엇이 노년의 발병에 영향을 주었을지는 연구하거나 입증하기 까다로운 과제지만 수십 년간 겪은 스트레스와 이에 대처하는 삶의 방식이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정황이 있다고 말한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삶의 활력이 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반복적인 스트레스는 혈압과 혈당을 올리고 뇌, 특히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 부위의 손상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노년의 질환을 예방하고 노화를 늦추려면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검진을 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우리는 평소 자신이 일상의 스트레스를 잘 처리하고 있는지,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사람들은 은퇴에 이를 때까지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다 세월을 흘려보냅니다. 학생 시절 시험 압박과 사회 초년병의 긴장감이 습관으로 이어지고, 여기에 성공의 욕망이 더해지면, 평생 바쁘고 정신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현재 삶에 대한 관조와 휴식은 비효율로 여겨지고, 지친 일상은 근사한 상품과 이벤트로 보상받곤 하죠. 그러다가 정년을 맞이하면 어느새 노년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평소에 삶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나이 듦을 떠올리면서 삶의 균형을 잡고 살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지위보다 자유, 돈보다 시간, 쾌락보다 의미 있는 삶을 떠올리며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고령화 사회, 특히 주의해야 할 ‘우울증’

노화가 진행되면 관절이 약해지고 시력, 청력, 기억력 등 신체와 정신의 여러 기능이 떨어진다. 안준호 교수는 가장 주의해야 할 질환으로 ‘우울증’을 꼽는다. 암이나 심혈관질환은 사망 원인으로 순위가 높지만, 우울증은 젊어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에게 흔히 발생하고 오랜 기간 큰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질환이라는 설명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인간의 모든 질환의 중요도를 발생 빈도, 질병을 앓는 기간, 그리고 장애 정도를 고려해서 평가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평가할 때 선진국에서 가장 중요한 질환은 단연 우울증입니다. 노년기 우울증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신체 증상을 동반하기도 하고, 무관심과 의욕 저하가 심해지면 치매와 감별하기도 어렵습니다.”

선천적으로 우울증 발병 위험이 높은 사람도 있지만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큰 영향을 준다고 한다. 남들과 비교해서 자신을 부족하게 보고 미래를 어둡게 전망할수록 발병 위험이 커지고 치료도 어려워진다. 안준호 교수는 “세상 일이 마음대로 안 되더라도 주어진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매사에 감사하는 태도가 우울증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애정 담긴 조언을 건넨다.

그 역시 앞으로 ‘자신과 가족의 나이 듦’을 자각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또 그는 의사로서 환자를 진료하면서 거창한 목표를 세우거나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만 않으면 의사의 본분, 즉 환자를 돕는 일에 집중하기 마련이라고 한다. 다만, 의미 있는 삶의 가치를 알기에 이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볼 참이다. “2020년은 모두에게 힘든 한 해였습니다. 일 년 넘게 적응하다 보니 지치고 외로움을 타는 사람도 늘었지만, 한편 삶의 거품도 많이 줄었습니다. 올해 팬데믹에서 벗어나면 평소의 활동을 되찾겠지만, 그중에서도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차분히 생각해보려 합니다.”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인 그가 건네는 인생 조언이 달다. 우리 모두 꽃 같은 봄, 강물 같은 나이 듦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봐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