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곱 봄에 있었던 일

글 노지양 / 사진 백기광(스튜디오100)

3층 높이의 탁 트인 천장에 현대적인 건물 내부 시설, 빠르게 움직이는 두 대의 에스컬레이터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지금 상하이나 샌프란시스코의 국제기구 빌딩에 들어와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누구나 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대학병원에 생전 처음 방문하여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껌벅거리며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그동안 얼마나 건강 면에서 복 받은 사람이었는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 병원에서 초진을 받기 위해 예약을 잡기란 무척 힘들다는 것과 진단의뢰서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도 사십 중반이 넘어서야 알았으니 말이다. 낯설고 두렵지만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세계에 다소 뒤늦게 진입했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자궁근종이 커지고 있다는 건 몇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누워 있으면 아랫배에 묵직한 덩어리가 만져졌고, 무엇보다 생리주기가 지나치게 짧고 생리 과다와 생리통도 심해 20일에 한 번씩 일상생활이 불편한 나날을 보낸 지도 수 년째였다. 올해 4월에 받은 건강검진에서 근종은 작년보다 2센티미터 이상 커져 7.5센티에 달했고 당장 산부인과에 내원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대학병원의 빠르고 체계적인 절차에 놀라워하면서 초진실과 초음파실을 거쳐 담당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근종이 상당히 큰 편이고 폐경까지는 아직 기간이 남았으니 수술을 고려해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복강경수술과 로봇수술에 대한 설명을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듣고, 수첩에 메모도 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확히 내 나이에 같은 증상으로 자궁적출 수술을 받았던 엄마는 분명 오늘도 또 전화해서 진단 결과와 나의 선택에 대해 물을 것이다.

며칠 뒤 심각한 얼굴로 남편과 딸아이에게 어쩌면 올해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전했다. 입원 전에 뭘 준비해놓아야 하지? 단 며칠이지만 나 없이 두 사람이 잘 지낼 수 있을까? 어떤 통증과 후유증이 날 기다릴까.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서 같은 증상으로 수술을 경험한 사람들의 후기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래, 용기 내어 수술을 받자.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다른 대형 병원에 전화를 해보았고, 대기 환자가 취소를 했는지 생각보다 빨리 예약 날짜가 잡혔다. 이번에 만난 의사 선생님은 반드시 수술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며 생리주기 조절에는 미레나라는 피임기구를 삽입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바로 그 방법으로 결정하고 몇 번이나 누웠던 산부인과 의자에 또 다시 누워 미레나 시술을 받았다.

지하철에서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수술 안 해도 된대.” “잘 됐다. 다행이네.”

그 단순한 대화를 몇 번이나 읽어 보았다. 그날 저녁 아이에게는 “엄마, 오늘 진짜 좋은 일이 있었거든” 하고는 휘파람을 불면서 저녁 밥상을 차렸다.

그때 나 자신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 하반기에 접어들고 있는 나는 이제부터 이 모든 과정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라고. 질병을 검색하고 병원과 의사를 알아보는 일, 병원의 공기와 냄새와 대기실에서 기다리면서 지나갈 나의 온갖 감정들에 대하여. 그리고 살면서 치러온 내 몫의 과제와 넘어온 고비들이 그랬듯 이 또한 때로는 떨면서, 때로는 씩씩하게 하나씩 넘으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질병의 발견과 치료는 내 삶의 어떤 문제들과는 달리 나 혼자 감내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뛰어난 기술과 훌륭한 의료진들, 든든한 보험이 있는 이 땅에서라면 예상보다 더 매끄럽게 헤쳐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플 때야말로 날 사랑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기대면 되지 않는가.

그리고 두 번째 병원에서 나왔을 때 두 시간 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던 공기도 기억한다. 중요한 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나왔을 때처럼 후련하고 자유로운 느낌, 하늘은 더 파랗고 나무는 더 진초록으로 보이던, 오늘의 평범한 일상이 새삼스럽게 기대되던 그 기분. 앞으로도 난 이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쓴 노지양 작가는 작가이자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영어영문과 졸업 후 라디오 방송작가로 활동했고, 현재 17년째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나쁜 페미니스트』, 『헝거』, 『케』 등 다수의 책을 옮겼고, 에세이 『먹고 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와 『오늘의 리듬』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