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아름답게

유미지

부끄럽게도 나는 쉽게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얼굴에 속이 전부 드러나는 부류의 사람 말이다. 감정을 언어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언어에 촉감이 있다면 분명 몽글몽글하고 폭신할 것 같은 “지금 너무 기뻐” “정말 행복해” “네가 정말 좋아” 등의 언어를 뱉어내는 데는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여기까지 읽으면 아이처럼 해맑고 소녀처럼 순수한 사람일 거라고 짐작할 테지만 사실 또 그렇지만은 않다. 감정에는 예쁘고 좋은 것만있는 게 아니니까.

문제는 자주 화를 내고 쉽게 분노한다는 것이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화를 낸다.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나름의 허용 범위와 제한 범위 중 제한 범위를 뚫고 넘어올 때, 공공의 도덕을 지키지 않고 ‘매너’라고는 구석구석 찾아봐도 한 톨도 없이 굴 때, 쉽게 말해 타인이 선을 넘는 행위를 일삼을 때 나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언성까지 드높일 때도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다음이다. 분노한 뒤에는 후회가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은 뒤에는 조금 전 뜨거운 불을 내뿜고 야수의 이빨을 드러냈던 나의 모습이 흡사 사람의 모습이 아닌 것만 같아 어디 동굴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꼭꼭 숨고 싶어진다. 다시 태어나도 ‘나’로 살고 싶을 만큼 자신을 아주 사랑하지만, 분노를 통해 감정을 그대로 투명하고 힘세게 드러내는 순간의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할 수가 없다. 도저히 예뻐할 수가 없었다.

사실 분노는 나쁜 감정이 아니다. 미국의 심리 상담사 류페이쉬안의 책 제목처럼 감정에는 잘못이 없다. 개인으로서 분노는 정당하고, 옳은 것이다. 분노하기보다 더 좋지 않은 것은 겉으로 화를 내지 않고, 속에 차곡차곡 분노를 쌓는 일종의 차가운 분노다. 억압하는 분노는 자신을 갉아먹는다. 누구나 화가 나는 상황은 있기 마련인데, 참는 일이 오랜 습관이 되었다면, 그것은 곪아 깊은 ‘우울’이 될 수도 있다. 분노는 타인을 향한 모습이지만 우울은 자신을 향한 감정이다.

분노는 표현해야 한다. 단, 표현하는 방법의 문제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를 바깥으로 꺼내보이는 식의 분노는 (대부분 가깝고 소중한 관계인)분노 대상에게 잊히지 않는 장면과 생채기를 남긴다. 또한 그동안 내가 숱하게 해왔던, 있는 그대로의 분노는 이기적이다.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감정 배설에 불과하다. 그런 모습이 왠지 어른스럽지 못한 것만 같아 고뇌에 빠진 오래전 어느 날의 나는 화가 난 순간에 실낱같은 이성을 데려오는 연습부터 하기로 했다. 화가 나는 순간 일단 숨을 고르고 ‘분노하는 모습’과 그 뒤에 벌어질 ‘후회의 장면’부터 상상하는 것이다. 기쁘게도 성실하고 꾸준한 반복 학습으로 지금의 나는 분노 횟수가 좀 줄었다.

물론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감정은 결코 저 혼자 사라지지 않고 나를 갉아먹을 수 있으므로 다른 때 좀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꺼내 놓는다. 같은 내용이라도 포장이 다르면 다르게 보인다. 우리는 누구나 분노의 감정을 절절하게 경험하고 느끼며 산다. 다만 그것을 매끄럽게 다듬어서 아름답게 꺼내 놓으면 될 일이다. 그것이 진짜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글을 쓴 유미지 작가는 글로벌 패션 라이선스 매거진 <코스모폴리탄>을 비롯한 다수 매체에서 피처 기자로 활동했다. 현재는 여행, 컬처, 헬스를 두루 다루는 프리랜스 에디터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