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여

안녕

유미지

살면서 슬펐던 순간, 슬픔에 북받쳐 엉엉 서럽게 울었던 기억을 바깥으로 꺼내 놓으려고 하니 어쩐지 미천한 경험인 것 같아 부끄러워진다. 고작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 장면이 떠오를 뿐이다. 이것마저도 이제는 옅어질 대로 옅어진 기억이라 당시의 슬픔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어려운 지경이다. 이렇게나 없다고?

더 어린 날들로 거슬러 가본다. 내 속에 정(情)이 뜨거워 그런 모양인지 초등학교부터 모든 졸업식에서 나는 정든 친구들과 선생님을 매일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 슬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졸업식 이별 장면 역시 누구나 지나왔을 통과의례처럼 느껴져 이 글을 쓰면서 괜히 쭈뼛거리게 된다.

웹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에 등장한 대사다. 오래전 연인과의 이별을 떠올려본다. 가장 가까웠던 사이, 연인이자 친구이고, 흡사 나와 동일하게 느껴졌던 대상, 온 마음을 내어준 대상의 부재는 그곳으로 향하는 애정이 갈 길을 잃고 방황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결국 슬픈 건 내 마음 아니던가. 이제는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게 된 그의 속은 당최 알 길이 없으니 그가 슬퍼서 내가 슬픈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나를 슬프게 만들었지만, 나는 이곳에서 슬퍼해도 좋고,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어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감정을 느끼는 건 곧 자유’라는 말이 된다. 가능하면 아주 한참, 길고 긴 먼 훗날이면 좋을, 지금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이들이 하나둘 떠나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상상하는 순간 벌써 훅, 슬픔이 북받친다. 훗날의 일을 오늘 미리 당겨와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 접어두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인생에서 어렵고 힘들고 슬픈 상황이 닥칠 때를 어느 정도 대비해야 한다.

나는 그 답을 사람과 시간에서 얻었던 것 같다. 가깝고도 소중한 사람들에게 기대 털어내고 울면서 좀 나아졌다. 처음에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하다가 조금씩 몸을 움직여 무엇을 하면서 시나브로 잊었고 그러는 동안 시간은 자연스럽게 흘렀다. 억지로 잊으려고, 서둘러 슬픔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울 수 있는 만큼, 눈이 퉁퉁 붓고 머리가 아플 만큼 실컷 울고 나면 어느 순간 그만 울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는 여유가 생겨 그로 인해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게 된 사실이 아프게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슬픔이 꼬리를 보이며 빠져나간 뒤 나는 전과 좀 달라졌다. 일단 내가 기특했다. 그 ‘어려운 이별을 해내고 여기에 도착했구나’ 하며 격려하고 토닥였다. 여전히 내 주변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의 반짝임을 깨닫게 됐다. 누군가의 슬픔을 “그까짓 것으로 왜 유난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감하고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 깨달았다. 슬픔도 살아있으므로 느끼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여전히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가득하다. 슬픔 속에서도, 혼란 속에서도 분명한 것 하나는 앞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따뜻한 내일이 온다는 사실이다. 이별은 슬프지만 우리는 아주 오래도록, 사는 내내 떠난 그를 기억해주면 될 일이다. 그리고 떠난 이의 마음까지 헤아려보면 우리가 나아갈 길은 생각보다 또렷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사랑했던 그들은 우리가 슬퍼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글을 쓴 유미지 작가는 글로벌 패션 라이선스 매거진 <코스모폴리탄>을 비롯한 다수 매체에서 피처 기자로 활동했다. 현재는 여행, 컬처, 헬스를 두루 다루는 프리랜스 에디터로 활동 중이다.